내 인생에서 가장 어두웠던 날을 꼽으라면 작년이다. 동시에 작년은 가장 밝았던 날이 있던 해이기도 하다. 해 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는 말처럼 암흑을 빠져나오자 그 어느 때보다 밝고 따스한 빛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혼을 하면, TV에서 보는 것처럼, 내 주변 사람들처럼, 으레 듣는 이야기처럼 아이가 어려움 없이 바로 생기는 줄 알았다. 우리 부부는 내가 경력을 쌓은 후 아이를 갖자는 계획을 세웠다. 이제는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마음처럼 되지 않았고, 미리 지어둔 태명은 3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난임. 상상조차 못한 단어가 내게 찾아왔고 내 모든 것을 흔들어놓았다. 어떤 이에게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진행된 일이 내게는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당시 느낀 것을 정리하며 50일 후 찾아올 우리의 아이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려 한다.



<첫 번째 실패>


난임으로 유명한 강남의 C병원을 찾았다. 처음 방문할 때는 원인이라도 알자는 마음이 컸다. 몇 가지 검사를 했다. 의사의 지시에 따라 남편은 약을 처방받았고 우선은 더 노력해보기로 했다. 아직 내 마음이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왠지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기대와 실패를 번갈아 느끼고 있던 어느 날, 직장 동료 둘의 임신 소식을 들었다. 당장 가서 축하해줘야 당연한 도리였겠지만 그때의 나는 참 어리고 못됐다. 물론 축하해주고 싶은 마음은 가득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들보다 먼저 결혼한 나에게 다른 동료들이 “애 언제 가질 거야?”라고 물을까봐 두려웠다. 숨고 싶었다. 그때부터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고 높은 마음의 벽을 쌓았다.


처음 병원에 간 지 반 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우리에게 행운은 찾아오지 않았다. 나도 그들처럼 꼭 임산부가 되리라는 결심으로 시술을 받기로 결심했다. 남편의 건강은 훨씬 좋아졌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인공수정(정자를 자궁 안으로 밀어 보내는 것)이 아닌 체외수정(채취한 난자와 정자를 수정시킨 수정란을 자궁 안에 이식하는 것. 흔히 시험관이라고 함)을 제안했다. 돈이 더 들고 과정이 힘들더라도 확률이 높은 체외수정을 택하고 일정을 잡았다.


2016년 3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임신을 위한 여정이 시작됐다. 사실 내가 겪고 있는 일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아니 처음에는 내가 문제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자 이 건은 최소 임신을 생각해본 사람만이 내 감정에 공감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정확하게는 난임에 고민했던 사람만이 날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들로 쉽게 말할 수 없었다.


회사 동료 몇에게는 내 사정을 설명했다. 상사에게는 휴가원에 사인을 받기 위해서였고, 또래의 동료들에게는 가능하다면 혹시나 있을 위로를 받고 싶어서였다. ‘하필 왜 내게 이런 일이.’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잘 될 거야.’라는 마음으로 내 스스로를 응원했다. 결심은 얼마 가지 않아 무너졌다. 때로는 사내에서 임산부를 배려하는 모습에, 때로는 누군가의 임신 소식을 듣고는, 임신에 관련된 작은 무언가만 있어도 내 결심은 어찌나 그렇게 약한지 금세 무너져 내렸다. 한번은 동료와 함께 퇴근하다가 갑자기 눈물이 터진 적이 있었다. 그는 근처 카페에 나를 데려가 등을 토닥여주며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줬다. 다른 이는 자궁 건강에 관한 책을 빌려주며 내 행운을 빌었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 누구보다 따스하게 나를 위로했다.


과배란을 유도하기 위해 열흘 정도 출근 전 매일 아침 배에 주사를 놨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면 슈퍼 히어로가 되기 위해 주사를 맞는 거라고 스스로 주문을 걸었다. 거의 이틀 간격으로 병원에 가 검진을 받으며 ‘때’를 기다렸다.


체외수정 중 가장 힘들었던 때를 꼽으라면 난자 채취를 한 후이다. 채취 당일 마취가 풀리면서 자궁을 누군가가 잡아 뜯는 것 같은 고통이 찾아왔다. 다음날은 가스가 찬 것처럼 배가 빵빵 하더니 퇴근길 지하철에서 식은땀이 나면서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구토가 올라와 지하철에서 내렸다. 남편을 만나 겨우 집에 왔고 속에 있는 것을 모두 게워낸 후에야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항생제가 부작용을 일으킨 것 같았다. 며칠을 고생했다.


수정란 이식 후 착상은 신의 뜻이었다. 되는 사람은 평소처럼 일해도 되고, 평소와 달리 누워만 있어도 된다. 휴가를 내고 며칠 쉬기로 했다. 계속 녀석이 어디 있을지 가늠했고, 하루에도 몇 번이나 됐다 안 됐다 내 마음은 오락가락 했다. 피 검사 당일, 결과를 몇 시간 뒤 전화로 알려준다고 했다. 합격을 기대하는 수험생의 마음으로 초조하게 남편과 드라이브 겸 바깥으로 나갔다. 점심시간이 되어 식당에 들어가 국밥 한 술을 뜨려는 찰나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피 검사 수치 0.3으로 임신이 아닙니다.” 전화를 끊고 눈물이 마구 쏟아졌고 세상에서 제일 맛없는 밥을 꾸역꾸역 입에 넣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내가 뭘 먹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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