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청소년 비전캠프




봉사단체인 더나눔플러스를 통해서 캄보디아 시엠립에

7월 24일(목)부터 29일(화), 봉사활동을 다녀왔다.


24일(목) 오후 7시 대한항공 비행기를 타고 현지에 10시 25분에 도착.

돌아올 때는 28일(월) 오후 11시 25분 출발, 29일(화)에 오전 6시 35분에 도착한다.


사실 선발대는 우리보다 이틀 먼저 현지에 갔다.

방문지를 미리 찾아가 상황을 보기 위해서.


스태프는 총 6명이다.

나와 오빠, 단장님, 사진작가님, 대학생 2인.

그 중 오빠와 대학생 2인은 선발대였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단장님의 어깨가 무거웠다.

수많은 짐과 15명의 천방지축 아이들을 어떻게 무사히 시엠립까지 챙겨서 간담?


인천공항에서 오후 3시에 집합하기로 했지만

더나눔 사무실에서 짐을 챙겨야 해서 12시가 조금 넘어 사무실에 도착했다.

간단히 점심을 먹고 인천공항으로 출발!


아이들이 도착하면 명단에 체크하고 준비한 모자와 단체티, 조끼를 나눠줬다.


체크인을 하는데 일이 하나 터졌다.

아이 하나의 여권 유효기간이 보름 정도 모자르는 것.

6개월 남아있어야 하는데 한 달도 아니고 보름이라니!

우리가 미리 확인을 했어야 하는데 놓쳤다.

항공사 직원이 공항에 있는 출입국센터(였나...)에 가면 임시여권을 발급해주는데 가보라고 했다.

물론 임시여권은 가면 100% 발급해주는 건 아니라는 것.

다행히 이야기가 잘 되어서 임시여권 발급 완료!


다른 소소한 사건은 짐을 부칠 때 벌어졌다.

부치는 짐을 한 명에 20kg 꽉꽉 채우려고 어떻게든 짐은 쌌는데

몇 개의 짐이 무게를 초과해서 현장에서 빼고 넣고...

짐도 무사히 잘 부쳤다.


한바탕 소동을 치루고 출입국 심사까지 마치고

면세점에 구경간다는 아이들을 보내놓으니 어찌나 마음이 편하던지...


아이들에게 6시 40분까지 돌아오라고 했는데 30분쯤 돌아왔고

각자 산 물건들을 자랑했다.

면세점 쇼핑을 해보고 싶었는지 학교를 오가며 봤을 로드샵에서 산 립밤을 자랑한 아이도 있었다.


비행시간은 5시간 반 정도, 길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순식간에 지나갔다.

처음 30분은 이륙하는 시간이라 처음 타는 대한항공 비행기 구경 조금,

1시간 정도 음료 마시고 저녁을 먹었고, 2시간 동안 영화 '로보캅'을 봤다.

나머지 시간 동안은 우리 멤버들 모두의 출입국 신고서와 비자 신청서들을 확인하고 작성했다.

사전에 작성법에 대해 설명을 했지만 막상 직접 써보려니 헷갈렸나보다.

입국에 문제가 있을까봐 나와 단장님이 확인, 또 확인.


인터넷을 검색하면 비자 신청 방법은 총 3가지다.

캄보디아 공항에서 신청하거나 캄보디아 대사관에서 신청하거나 인터넷으로 신청하거나.

캄보디아 공항에서 하는 것이 비용이 가장 싸서 보통 이 방법을 쓰는 걸로 알고 있다.

신청비는 20달러지만 공항 직원들이 웃돈을 요구하며 땡깡을 부리면 몇 달러 더 줘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단체, 특히 아이들을 인솔하고 있어서 약간의 꼼수를 쓰기로 했다.

단장님의 결정에 따라 인당 25달러를 내기로 하고 여권과 신청서를 담당 직원한테 맡겼다.

심사할 것도 없이 바로 통과!

사실 신청비 외의 돈은 직원들의 주머니로 들어가기 때문에 이러면 안 되지만 어쩔 수 없지만서도..

이렇게 또 안 좋은 사례를 만들고 입국을 했다.


심사(?)가 끝나자마자 우리가 바리바리 싸들고 온 짐을 찾으러 갔다.

갯수가 맞는지 세고 세고..

아이들 챙기랴 짐 챙기랴, 후다닥 챙겨서 나갔다.


선발대가 마중을 나와있었다.

버스에 짐을 싣고 20분 정도 달려 압사라 앙코르 호텔(Apsara Angkor Hotel)에 도착했다.

2인 1실로 방 배정을 한 결과를 아이들에게 전달하고 우리 방에 모이게 했다.

모두들 무사히 입국한 것을 자축하며 앞으로의 일정과 주의사항을 전달했다.

선발대가 사전 답사한 내용을 얘기할 때 가장 화제가 됐던 것은 쓰레기 마을이었다.

냄새와 파리 등 상황이 너무 심각해서 갈지 말지 조차도 함께 의논해야 할 것 같다는 것.

아이들은 기특하게도 이왕 여기 온 거 한번 가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쓰레기 마을에 가기로 결정한 그 찰나, 한 아이가 가방이 없다고 했다.

사실 OT 전에 이 사건이 일어난 건지 정확이 언제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가이드 선생님과 아이는 공항에 곧바로 갔다.

자신의 가방부터 챙기고 공통의 짐을 챙겼어야 했는데 공통의 짐부터 챙기다보니 깜빡했던 것 같다.

다행히 공항에서 짐을 보관하고 있어서 바로 찾을 수 있었다.


본격적인 일정을 앞두고 체력을 비축하기 위해 씻고 바로 잤다.

시엠립의 아침은 어떨지 궁금해하며...

  캄보디아, 하면 어떤 것이 떠오르는가. 후진국, 앙코르왓, 킬링필드, 분간이 되지 않는 캄보디아어 등 여러가지가 생각날 것이다. 나도 처음에는 그랬으나 지금은 다르다. 평소 종종 활동하던 '더나눔플러스'를 통해 2014년 7월 24일부터 29일까지 4박 6일 동안 캄보디아 시엠립에 다녀왔다. 첫 해외 봉사이자 첫 캄보디아 방문. 13~16세로 구성된 15명의 청소년과 6명의 스태프, 총 21명이 시엠립에서 땀을 흘렸다. 이곳에서 남편이 국장으로 일하고 있고 스탭이 부족해 도움을 요청한 것도 참가의 이유였지만 무엇보다 캄보디아에 가보고 싶었고 직접 거기서 봉사를 해보고 싶었다. 봉사를 마친 후 나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 뿌듯했습니다'라고 생각할 줄 알았다. 어느 정도는 맞다. 사실 내가 거기서 느낀 건, 다음에는 우물 파는데 돈을 보탠다든가 하는 둥의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싶다는 것과 캄보디아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나라라는 것이다.


  캄보디아는 Kingdom of Cambodia라는 국명에 맞게 입헌군주제 국가이며 왕이 존재한다. 수도는 프놈펜으로 우리나라보다 2시간이 느리다. 그 외에 유명한 도시는 시엠립과 씨하눅빌이 있다. 캄보디아어 혹은 크메르어가 쓰이나 과거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던만큼 50대 이상 장년층에서는 불어도 쓰인다. 최근 젊은층은 영어를 사용한다. 면적은 181,035㎢(CIA 기준)로 한반도의 80%, 남한의 1.8배이며 인구는 약 15,458,332명(CIA 기준)으로 우리의 30% 수준이다. 캄보디아에는 인구에 관한 신기하면서도 슬픈 역사가 있다. 1975년~1979년 사이 폴 포트의 급진 공산주의 정권 크메르루즈가 200만명의 시민을 무참히 학살해 현재 장년층, 노년층의 수가 적은 편이며 평균연령도 21.3세라고 한다. 90년대 초반 들어 국가가 안정을 찾으면서 비로소 조금씩 발전을 꾀하고 있다. 따지면 캄보디아는 20대 초반의 혈기왕성한 국가이자 6.25 전쟁을 겪고 한창 발전을 하던 70대 말 우리나라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덧붙이자면 캄보디아어는 영어와 어순이 비슷하다. 대학살 때 영어 교사들이 많이 희생되었지만 최근 영어 교육에 대한 열기가 점점 뜨거워져 아마 10년 후에는 모든 국민이 영어회화가 가능한 수준으로 발돋움 할 것이다. 캄보디아는 이제 발전할 일만 남았다.


  시엠립으로 가면서부터 돌아오면서까지 계속 생각했다. 앙코르왓이라는 엄청난 건축물을 만들었던 민족이 어째서 지금은 이렇게 가난한 걸까?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이라고 하는 앙코르왓. 직접 보면 정말 엄청나다. 앙코르왓을 보고 "미쳤다"라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실제로 탑은 5개이지만 정면에서 보면 너무 정교해서 탑이 3개만 보인다. 접착제가 없어도 무거운 돌들은 세월을 이겨내고 있고, 벽과 천장은 지금 기술로도 만들기 힘들 정도의 문양으로 꾸며져있다. 앙코르왓과 앙코르톰 등 앙코르 유적을 위해 크메르 왕조는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 코끼리를 동원해 멀리서 돌을 가져올 정도였다. 왕조의 모든 기술과 노력이 사원과 무덤을 건립하는데 쓰이다보니 국정을 돌볼 여력이 없었던 것 같다. 크메르 왕조는 급격히 쇠약해졌다. 거기에 태국과 베트남 등에 꾸준히 침략을 받았고 프랑스의 식민통치까지 받게 된다. 결정적으로 1970년대 폴 포트의 크메르루주가 공산주의 사상을 펼치며 학자, 여성, 심지어 안경을 쓴 사람들까지 무자비하게 학살을 해 150만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되었다. 나라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책을 불태우기까지 하는데 나라가 한창 발전해야 할 시기에 아무 것도 없던 시절로 돌아가게 되었다. 현재는 캄보디아의 주요 수입원이 된 앙코르왓, 가슴 아픈 역사인 크메르루주 대학살이 캄보디아를 가난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첫 해외 봉사활동, 첫 캄보디아 방문. 캄보디아는 내게 여러 면에서 처음이었다. 그렇지만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인생의 목표까지 바꿀 정도로 깊은 감명을 받은 곳이었다. 24일 목요일 저녁 7시 비행기를 타고 28일 월요일 밤 11시 35분 비행기를 타기까지, 캄보디아에서 온전히 시간을 보낸 건 3일 반 정도 뿐이지만 그 짧은 시간동안 시엠립 주민들의 아래부터 위까지 모두 보며 생각이 참으로 복잡했다.


  캄보디아에 다녀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내가 작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어 뿌듯했습니다"라고 생각할 줄 알았다. 맞다. 그러나 다르다. 함께 간 15명의 아이들은 물론 나마저도 캄보디아에서 성장했다. 어찌 보면 부끄러운 소리다. 봉사를 하러 간 사람이 더 많은 도움을 주기보다는 자기가 배웠다고 하고 성장했다고 말하는 것이 초보 수준의 생각일 수는 있지만 나름 봉사를 해봤다고 자부한 내가 그동안 했던 생각을 송두리째 바꿀 정도로 캄보디아에서의 며칠은 정말 뜻깊었다.


  캠프에 참가한 아이들은 보통의 아이들과는 달리 착하고 의젓한 편이었지만 아이들끼리 봉사활동을 하고 무언가 역할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었다. 너무나도 천진난만했고 어려움이라고는 모르는 것 같았다. 심지어 아는 친구도 없이 온 아이들은 낯도 가리고 많이 힘들어보였다. 과연 이 아이들이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 그러나 그건 지나친 걱정이었다. 첫 일정을 진행하고 금요일 저녁, 호텔 수영장에서 논 후 아이들은 순식간에 친해져서 배정된 방은 신경쓰지도 않고 자기네들끼리 뭉쳐서 자고 난리였다. 언제까지 모이라고 하면 공지된 시각보다 10분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고 주어진 과제도 충실히 수행했다. 누군가가 어려움에 처하면 서로 도왔다. 오히려 부족했던 쪽은 나를 포함한 스탭들이었다.


  봉사활동의 주요 프로그램인 결혼식이 끝나고 봉사단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남은 일정도 무리없이 흘러갈 거라고 생각했으나 그건 착각이었다. 3일째인 27일 일요일 오전에 쓰레기 매립지 내에 있는 마을에 갔다. 미리 답사를 다녀온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냄새가 엄청날 뿐 아니라 파리가 눈을 뜨지 못할 정도로 많아 멀리서만 보고 돌아가는게 나을 수도 있다고 했다. 캄보디아에 도착한 날 밤에 진행한 OT에서도, 전날 밤에도 아이들은 가는게 좋겠다고 답했고 마스크는 예의가 아니니 그냥 가겠다고 했다. 기특했다. 그래서 도착한 쓰레기 마을. 다행히 전날 비가 와 냄새가 덜한 편이었으나 음식물 쓰레기 주변에 둘러싸인 것처럼 냄새가 진동을 했다. 우리가 도착해서 두리번거리고 있자 마을 아이들은 어떻게 알았는지 뛰어와 우리 앞에 줄을 섰다. 이런 경우가 익숙하다는 듯 줄을 섰다. 가슴이 아팠다. 종류에 상관없이 1명에게 하나씩만 물건을 주기로 했지만 받은 물품을 숨겨두고 다시 줄을 서는 아이들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지금이 이곳 아이들에게는 꼬질꼬질한 옷을 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을 기회이기 때문이다. 어른의 하얀 긴바지라도, 뭐든 받아야 도움이 된다.


  순식간에 물품이 동이 나고 쓰레기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푸르른 논과 하늘, 뛰어노는 아이들과 수다를 떠는 아낙네를 보면 그저 평범한 마을이지만 그곳의 주민들은 쓰레기를 뒤져 쓸만한 것을 찾아 생활한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분리수거를 하지 않고 휴지든 페트병이든 음식물 쓰레기든 한꺼번에 버린다. 우리에게는 쓰레기, 그들에게는 보물창고이자 일터. 뭐라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 멍하니 보고만 있는 우리들 옆에 미국 펜실베니아에서 온 선교단체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고 있었다. 일하는 그들의 흥을 돋우려는 듯 말이다. 내가 마을의 아이들에게 사탕과 옷을 나눠주고 하는 것이 옳은 행동일까. 분명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맞지만 올바른 봉사활동이 맞는 것일까. 헷갈렸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쓰레기장으로 가는 길에 본 어떤 아주머니였다. 길가에 앉아서 수박 껍데기를 열심히 다듬고 있었다. 순간 '설마'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설마는 정말이었다. 돌아가는 길에 봉사단 아이가 눈물짓길래 물어보니 아주머니가 음식물 쓰레기를 뒤져 덜 상한 밥을 골라내 주먹밥처럼 뭉쳐 아이에게 먹이는 걸 봤다고 했다. 아마 수박도 발라내 아이에게 먹였을 것이다. 할 말이 없었다. 답답했다. 쓰레기 마을에서 여러 면에서 충격을 받아서 그런지 고아원과 톤레삽 호수에 가서는 우리 모두 놀라지 않았다. 너무나도 해맑은 모습으로 노래하는 고아원 아이들의 모습에 가슴 찡하기도 했지만 쓰레기 마을이 생각나 미안하게도 괜찮아보였다.


  마지막 날에는 앙코르 유적에 갔다. 방콕의 에머랄드 사원과 많은 유적들을 볼 때는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앙코르왓과 앙코르톰을 보고는 "미쳤다"라는 말만 나왔다. 말로만 듣던 앙코르왓,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 엄청난 앙코르왓에 비해 너무나 슬픈 캄보디아의 역사와 현재. 하루에도 몇 번씩 다른 감정이 왔다갔다했다. 이 나라 저 나라에 치이고 다른 나라의 지배 아래 놓이기도 했었다. 우리나라와 흡사한 역사, 괜스레 더 마음이 갔다.


  캄보디아 사람들은 불편한 환경에도 행복해보이고 우리는 왜 풍족한 삶에도 행복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물론 우리가 캄보디아 사람보다 돈을 많이 벌고 쾌적한 공간에서 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잘 살고 있기 때문에 무조건 행복하다고 정의내릴 수는 없다. 개개인마다 행복의 기준은 다르기 때문이다. 마치 자살을 하는 사람에게 그것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는 건 옳지 못하다,라고 하며 언어적 폭력을 휘두르는 것과 같다. 또한 캄보디아인들이 처한 환경이 좋지 않다고 해서 무조건 불행한 건 아닐 수 있다. 쓰레기장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을 보고, 밝은 표정으로 노래를 하는 아이들을 보며 내가 느낀 건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이 그 자체로도 아름답다는 것이다. 나도 내 자리에서 맡은 바를 충실히 행하면 그것만으로도 되는 것 아닐까? 


  다음에 봉사를 가게 되면 우물 건설에 필요한 돈도 기부하고 그곳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물건들을 직접 모아 가져다주고 싶다.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만한 것이 어떤 것이 있는지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기고 싶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나라는 캄보디아를 잘 모른다. 서점과 도서관에 가면 캄보디아에 관해 여행책도 얼마 없을 뿐더러 어학책도 몇 년 전에 나온 책만 한 두 권 있을 뿐이다. 베트남 다음으로 캄보디아를 찾는 관광객이 많은 우리나라, 캄보디아에 우정의 길을 놓고 도서관을 짓는 등 많은 도움을 주는 우리나라, 이전까지는 나도 몰랐고 아마 국내의 많은 사람들도 이 사실을 모를 것이다. 캄보디아가 좋은 길로 발전할 수 있도록, 우리나라 사람들이 캄보디아에 많은 관심을 갖도록 힘쓰고 싶다. 나는 캄보디아에서 많은 것을 얻었고 또 거기에 두고 왔다. 곧 찾으러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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